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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발전과 고난의 역사.'친일'청산되지 못한 미래. 최루탄과 독재시대

예수에의해사는자 2018. 4. 26. 09:09

·우리 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시대적으로 가장 불행하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누구였을까요?

생각건대 아마 1580년경에서 태어나 1640년쯤을 넘기며 살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10대에 임진왜란(일본,1592)을, 40대에 정묘호란(금,1627)을, 50대에 병자호란(청,1636)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당시의 참상과 그 영향은 '전설의 고향'에 등장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다음으로 살기 어려웠던 시기는 아마도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일 것입니다.

이번에도 중국과 일본이 들어와 우리나라를 도륙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 민족의 고난사는 6.25전쟁을 비롯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 고난의 역사시대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르고 우리끼리 내부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분열...또 다시 되풀이 할 것인가요?



역사는 1보 전진하고 반보 후퇴하면서 발전합니다.

그래야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국민에게 철저히 각인되어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습니다.

(한 국가의 민주정치는 그 국민의 민주주의 수준에 걸맞는 민주정치를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교육'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발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이 책은 역사 인식이 별로 없는 학생들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아이들에게 친일에 관련한 궁금증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알려줄 수 있는 책입니다.

●‘살기 위해선 친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요?’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에서는 친일 청산이 왜 되지 못하고, 아직도 친일이 옹호되고 있는지를 잘 알려주는 질문과 답변이 많습니다.

‘살기 위해선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요?’ 와 ‘친일파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뭐라고 변명하나요?’는 질문에 저자 정운현 선생은 친일파들이 친일로 들어선 계기는 대부분 ‘기득권 지키기’나 ‘출세욕’,’그리고 무엇보다 ‘편하게’살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일파들이 말하는 ‘공범론’은 일제강점기 세금 내고, 학교 가고, 일본말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을 친일파로 만들어 그 속에 자신들을 숨기려는 교묘하고 파렴치한 주장입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나온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를 아주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한국의 주권을 침해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자, 독립군을 살상, 박해한 자, 일본군, 일본경찰,일본 헌병, 민족주의 정신과 신념을 배신하고 반민족 언론과 저작,기타 방법으로 지도한 자 등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는 더 자세하게 일본제국주의 군대 소위 이상의 장교나 고등문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아무나 친일파라고 하지 않고,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던 자들만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들만은 반드시 우리 역사가 기억해야 합니다.

●‘친일파 청산, 다른 나라는 어떻게 했나요?’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에서 정운현 선생은 북한, 중국, 대만, 프랑스의 친일파와 나치협력자 처벌을 설명하며, 한국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친일파를 ‘한간’이라고 부르며 ‘징판한간조례’와 중국 형법 등에 근거를 둔 ‘한간재판’을 통해 처벌하고 청산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한간재판은 1946년 4월부터 1948년 9월까지 2년 5개월간 중국 전역에서 시행됐습니다. 당시 사법처리건수는 45,000여건이었으며, 집행이 확정된 사람은 14,932명이며, 이중 사형이 집행된 친일파는 359명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한간(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해 항일경비로 한다’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4년 2개월 동안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나치협력자’를 1944년 전국에 ‘협력자재판소’를 설치하여 처벌했습니다.

협력자재판소에서 취급한 재판 건수는 총 5만 5,331건이었으며, 이중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767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프랑스는 ‘협력자재판소’와 별도로 ‘비국민 판정’을 담당한 시민재판부에서도 나치협력자를 처벌했는데, 시민재판부의 재판에 따라 4만6,646명의 공민권이 박탈당했습니다.

최고위층 인사에 대한 재판을 담당했던 ‘고등협력재판소’에서는 페탱 원수와 라발 총리 등 최고위층 108명에 대한 재판을 벌여 사형 18명, 징역 및 금고형 22명, 시민권 박탈 15명 등의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못한 한국’

프랑스는 4년 2개월 동안 점령당하고도 수만 명의 나치협력자를 처벌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35년간 일제 지배를 받은 대한민국은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못했습니다.

◑반민특위친일파청산1

우리나라도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친일파를 체포, 조사했습니다.

반민특위는 총 688건을 취급 이 중 559건을 특별검찰부로 송치했는데 이 중 기소건수는 221건에 불과했으며, 실제 구형은 41건뿐이었습니다.

실제 구형이 됐던 41건도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으로 모두 무죄 또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결국,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지구상에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젠틀맨’인가요?

요새 학생 중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젠틀맨’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이 역사를 등한시하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 상징인 욱일승천기가 버젓이 거리 간판에 사용되어 있고, 유명 연예인들이 욱일승천기를 상징하는 의상이나 소품, 포스터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욱일승천기)↓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친일파 청산이 꼭 필요한가요?’를 묻는 말에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의 저자 정운현 선생은 ‘어제 없는 오늘은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보다 더 교묘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한반도를 제물로 삼을 수 있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친일이 청산되지 못했기에 한국이 다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언제든지 협력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때는 과연 누가 목숨을 바쳐 한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겠습니까?

늦게나마 한국 근현대사에 눈을 뜬 아이엠피터에게 친일연구가 임종국 선생과 정운현 선생은 하나의 지침서와 같은 고귀한 자료를 주고 있는 분들입니다.

임종국 선생은 권력도 재산도 없는 가난 속에서도 평생을 친일연구에 매진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정운현 선생은 언론인으로 살아가다가 MB정권에서 쫓겨난 후에도 계속해서 친일파 연구와 출판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와 저서 집필은 돈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이 두 사람의 책만큼은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하기보다, 어떻게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인지 고민했으면 합니다.


(건국절과 친일파)

2016년 건국절 논란이 뜨겁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날을 건국절로 지정하자. 이렇게 새누리당이 논의를 공식화하면서 이제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른 논쟁.


건국절을 48년 8. 15로 지정하자고 하는 측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우리가 인정 안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임시정부는 영토도 없고 주권도 없고 국제적인 인정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때를 대한민국 국가가 시작된 날로 볼 수 있겠느냐 대한민국으로 볼 수 있겠느냐’ 는 주장.


그게 바로 우리 역사를 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됐다.

각 나라마다 역사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건국의 동기, 원인이 다 다르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그런 걸 다 갖추고 건국된 나라가 있는가.

예를 들어 미국이 1776년에 미합중국이라고 독립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당시 미국은 영국 식민지이고 국가나 영토나 주권, 아무 것도 없었다. 국제적인 인정도 그때 전쟁 때 프랑스 한 나라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람들은 독립기념일을 미국의 출발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하고 기념하고 있다.

최소한 미국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국가의 지지를 얻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중국의 호법정부가 있었는데 그 중국 호법정부, 러시아의 레닌 정부, 프랑스, 폴란드의 망명정부, 또 리투아니아 정부 이런 데서 다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했다.


또 이 사람들이 보면 건국절 없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알량한 애국심을 자꾸 자극해서 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들 지지를 얻어 보려는 그런 짓을 하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이 건국절이 있는가. 독립기념일만 있다. 미국에 독립기념일만 있어 가지고 미국 국민들이 그걸 창피해하는가?


그러면 왜 자꾸 이렇게 건국절 법제화, 48년 8월 15일이 중요하다, 우리 생일이다 이런 얘기가 자꾸 왜 나오느냐?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 또 우리 사회가 제대로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지금 건국절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위 ‘건국’ 70주년이 되는 해인 201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건국절을 48년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친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견강부회(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에 맞도록 함), 억지다. 건국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가 독립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친일단죄는 단죄고 건국은 건국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게 바로 친일 매국노 후손들이 하는 소리다.

어떻게 친일 청산은 친일 청산이고 건국은 건국인가? 이게 따로 이야기가 될 수가 없다. 그럼 건국이 만약에 1948년에 됐으면 그전에 친일 한 건 다 묻히고, 나라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친일이 문제가 되겠냐?

우리가 다 일본 사람인데, 일본 사람이 일본을 위해 애쓰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냐?

48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보는 순간 그전의 임시정부가 노력했던 그 모든 기간들은 일본의 것이 돼버리면서 그 당시 일본을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 친일파들도 그게 친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이 돼버리는 것, 그런 식으로 해 과거를 지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쪽에선 이런 얘기도 한다. 1919년을 건국으로 본다면 1919년부터 45년까지 독립운동이라는 걸 한 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 독립운동을 했다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없었다는 의미 아니냐는 것,


이것도 말장난 같은 것에 지나지 않다.

예를 들면 작년에 암살이라는 독립운동 영화를 보면 과거 친일 매국노들이 우리 독립투사들 고문하고 그러면서 아주 비웃는다. 왜 되지도 않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고 돈을 걸고 피를 흘리느냐, 비웃었다.

지금 해방 이후 70년이 넘었는데 딱 그 후손들 같은 소리와 같다.

말하자면 그 당시와 같은 그런 소리로 비웃는 것과 같다.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독립운동해서 독립적인 나라가 된 게 아니다 라는 것이 속에 깔려있다. 미국이 전쟁에 이겨서 독립된 거다. 독립운동 한 사람들이 뭘 했냐. 2차대전 일본 땅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우리가 독립이 된 거지, 열강들 덕분에. 독립운동가가 한 게 뭐 있느냐, 임시정부가 한 게 뭐 있냐.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독립운동을 짓밟고 싶은 그런 마음이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그 점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1948년 8월 15일을 정부수립이라고 하고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안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결국은 미국이 전쟁에 이겨서 독립된 나라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 정부조차도 제헌헌법에서 임시정부를 우리 국가의 출범으로 보고 있다.


런데 지금에 와서 왜 우리가 건국절을 다시 48년이라고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역사교과서가 나오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라고 써 있다. 그러니까 양쪽 주장을 두 줄 속에 다 담은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수능시험을 본다면 정답이 두 개가 되는 것이다.


건국절 문제는 보수 대 진보의 논쟁이 아니다.

우리 광복회 회원의 절반 이상은 보수적인 입장에 가까운 분들이다.

그런데도 전원이 건국절엔 절대 반대하고 있다. 이 사실을 잘 알아주셨으면 한다.

우리 국민들께서 애국가 들으시면서 뜨거운 심장 경험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가진 분들이라면 꼭 그제 발표된 광복회 성명서를 찬찬히 읽어봐 주셨으면 한다.

역사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광복회 김능진 이사, 김능진 이사는 독립기념관장을 지냈고 독립운동가 김병우 선생의 손자이다. 광복회회원이 수권자가 한 7000명 넘는 분들이 계시고 생존 독립 운동가가 지금 일흔 한 분 정도 계신다.


(오늘 노컷뉴스에서 옮긴 글도 있음)


'천황폐하 만세 삼창'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이정호 한국환경정책ㆍ평가연구원(KEI)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이 '정직 2개월' 처분을 받았다.

26일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한국환경정책ㆍ평가연구원(KEI)은 전날 이 같은 처분 결과를 담은 공문을 국조실에 전달했다.


(친일파 이두황)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13일 전북 전주시 견훤로 기린봉 초입에서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가로 1m, 세로 2m의 크기로 세워진 단죄비에는‘백 년 만의 단죄, 친일 반민족행위자 이두황’이라는 제목 아래 이두황의 친일행적이 적혔있다.

이두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 1대대장으로 암살을 이끌었다.

서울태생으로 1908년에는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른바 일본의 ‘남한대토벌’로 불리던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초토화하는데 앞장섰다.

6년 동안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중에는 일제의 토지 수탈에 협력했다.

이두황은 동학혁명 농민군을 학살했으며 37세에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했다.

그는 친일 공로로 1910년부터 사망한 1916년까지 전라북도의 도장관(현 도지사)의 요직을 지냈다.

이두황의 묘는 전주시 완산구 기린봉 중턱에 있다.

단죄비 제막식을 마친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이두황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민족 반역자였지만 명실상부하게 단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면서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단죄비를 설립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역사의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자기반성의 계기도 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때늦었지만 단죄비를 세우게 돼 후련하며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2016.8.22에서 옮김)


(독도는 우리 땅 퍼포먼스)


최루탄!

최루탄 만드는 회사가 돈을 번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생각하면 생산 가치가 없는 것이 돈 잘 버는 참 아이러니한 시대였습니다.

옛날 대학시절 바로 내 앞에 떨어진 최루탄 때문에 숨도 못 쉬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최루탄으로 인하여 따갑고 눈물 나고 쓰라린 아픔, 숨도 못 쉬며 도망치는 고통, 그때 대학생들이 고생한 덕으로 이렇게 민주화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최루탄은 독재시대를 방어하는 총탄역할을 했습니다. 

군부 독재 당시에 남영동 대공분실은 악명을 떨쳤습니다.

전에 직장 동료가 우리나라에 전두환 같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두환을 살려두는 이유는 우리 국민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어느 곳, 어느 시대나 사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지만 거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고 나 또한 그런 사람들처럼 악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독재정치이고 

자본주의 경제는 참 불공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응애'하고 태어나니 부자집이고

어떤 사람은 '응애'하고 태어나니 지지리 가난한 집입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공정한 경쟁이 되겠습니까?

태어날 때무터 불평등합니다.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불평등한 세상인 것입니다.

한국의 상위 1%가 유지되며 사회를 이끌어가고 나머지는 걱정 없이 먹고살 만큼만 되면 문제없는지. 아니면 아랫물과 윗물이 섞이며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가 바람직한지?

경제성장으로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빈곤 시대는 사실 끝났습니다.

이제 상대적 빈곤이 더 깊어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노동소득 격차도 여전하지만 부동산,·주식 같은 자산소득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며 ‘그들만의 리그’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1인당 국민소득 45달러에서 올해 3만 달러 시대가 열리지만 대중의 삶도 함께 나아졌는지 에는 의문부호가 따르는 세상입니다.

 

조선건국 이래로 600년동안 우리는 부정의한 권력에 맞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하고 패가망신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며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짖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서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값을 하고 살았던 우리 600년의 역사,,,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순응하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른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르침이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이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합니다.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젠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퍼온 글)

덧글

고난 많은 인생 삶 속에서 내 사정을 하소연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해결을 간청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살아갈 힘을 얻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모두가 감사하는 삶을 사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