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겸손하신 두 수녀님
60년대 초 꽃다운 나이에 고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당시 양성 한센병 환우들로 가득 찼던 소록도로 건너온 두 분,
마리안 수녀님과 마가렛 수녀님.
두 수녀님은 10년 20년이 아니라 장장 43년 동안 상처 입은 사람들의 외로운 섬 소록도를
한결같이 지켜왔습니다.
수녀님들은 당신들이 처음 소록도에 도착했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셨습니다.
“소록도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환자가 6천명이었습니다.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주면서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수녀님은 그야말로 한센인들의 친어머니가 되셨지요.
수녀님들의 평생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센인들의 고통과 신음을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수녀님들의 단골 기도 주제는 한센인들의 치유였으며 한센인들의 자립이었습니다.
정성어린 치료와 보살핌 끝에 완치 판정을 받고 소록도를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주머니에
수녀님들은 아끼고 아낀 용돈을 찔러 넣어주곤 하셨습니다.
두 수녀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했었는지는 나중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전해진 소록도 주민들의 편지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큰 할매, 작은 할매, 감사드립니다. 그토록 곱던 젊음을 다 바쳐 소록도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내신 할머니 두 분께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수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두 수녀님은 철저하게도 자신들의 선행을 감추면서 모든 영광은 오로지 주님께 돌렸습니다. 수녀님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상(償)이나 인터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번 제대로 떠볼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볼까,
안달복달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정말이지 너무나 차이가 났습니다.
병원 측이 회갑을 맞이한 수녀님을 위해 잔칫상을 차려 초대했습니다.
수녀님들은 기도시간이라며 성당으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43년간의 묵묵하고 충실한 봉사 끝에 두 수녀님은 또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도 힘들어질 것이고 오히려 이곳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
두 수녀님은 요란한 송별식이 싫어 관할 구역 주교님께만 자신들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수신처가 소록도 주민들인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두고 섬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43년 전 도착했을 때와도 똑같았습니다.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20Kg짜리 여행 가방 하나씩이었습니다.
소록도를 떠나는 새벽 두 수녀님은 멀어져가는 섬과 소록도 특유의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록도는 그분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20대부터 70대까지의 인생 전부를 바친 소록도는 고향과도 같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께서 몰래 떠나신 것을 알게 된 한센병 환자들과 소록도 주민들은 얼마나 서운하고 또 한편으로 감사했던지 열흘 넘게 소록도 성당에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있는 수녀님들의 작은 방문 앞에는 수녀님들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어로 붙여져 있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수녀님이 얼마나 소록도를 사랑했던지 이런 말씀을 남기셨답니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철저하게도 수도자적이고 참으로 겸손했던 수녀님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겸손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이 오고 싶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그분께서 원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광은 털끝만큼도 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이런 겸손하신 아들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너무나 흐뭇하셨습니다.
얼마나 대견스럽고 든든하셨기에 겸손하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어느 수녀의 기도
주님,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늙은이의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을 말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인내심을 갖고 참으며 들어 줄 수 있게 하소서.
제게 겸손 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틀림을 기억하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 주소서,
심술궂은 늙은이가 되어 마귀가 좋아하지 않게 하소서.
아 멘.
한글과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
한글 발전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미국인,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
그는 한글에 띄어쓰기와 가운뎃점(·) 찍기를 처음 도입했고 독립운동가 서재필에게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자고 제안했고 미국에서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는 논문을 발표(1903년)하기도 했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조선 최초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에 외국어 교사로 입국해 당시 매우 가난하고 글은 물론 그 어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을 보고 조선의 근대화를 돕겠다는 결심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한글을 접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서툴지만 나흘 만에 어느 정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이 조선을 문명국가로 끌어올릴 ‘비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전히 한자를 쓰면서 한글을 무시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1891년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제작했다.
세계 각국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의 천문·지리·사회서였다.
한글 사용을 호소하고 선비와 백성,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 책은 근대 교육사와 한글사에 크게 공헌했다.
육영공원이 축소 운영되자 헐버트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한글 사랑은 식지 않았다.
1892년 미국에서 한글과 관련한 최초의 논문(‘한글’)을 썼다.
1893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온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며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한글에 띄어쓰기법과 가운뎃점 찍기를 도입한 게 연구 성과다.
고종의 정치·문화·외교 자문에도 응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49년 7월29일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지만 8·15 광복절 행사를 10여일 앞둔 8월4일 별세했다. 헐버트 박사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영국 BBC방송 프로그램에 한 노신사가 초대되었습니다.
왜 자신이 이 프로그램에 초대되었는지도 모르는 노신사에게 아나운서는 놀라운 자료를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그 노신사에게 보여준 것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669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영국으로 입양시킨 증거서류와 사진들이었습니다.
노신사의 이름은 영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니콜라스 윈턴입니다.
방청객들은 윈턴 씨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윈턴 씨는 오히려 부끄러워했습니다.
전쟁 당시 29살 은행원이었던 윈턴 씨는 아이들까지 갇힌 나치의 난민 캠프의 실상을 보고서는
사비를 털어 669명의 아이를 영국으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지만,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마지막 250명의 아이를 태운 기차는 출발조차 못 했으며,
그 아이들은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구한 아이들 보다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심한 죄책감을
느낀 윈턴 씨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50년 후, 그의 아내가 관련 서류를 우연히 발견하여 방송에 알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송에 불편해하는 윈턴을 보며 아나운서가 말했습니다.
"혹시 방청객 중에 여기 있는 니콜라스 윈턴 씨가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 있다면 일어나 주세요."
그러자 윈턴 씨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들이 윈턴 씨를 위해 그 자리에 모인 것이었습니다.
윈턴 씨는 그들과 함께 50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윈턴 씨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와 손자들까지, 약 6,000명의 가족들을 '니키의 아이들'이라고 부릅니다.
2002년에는 '니키의 아이들' 5,000명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으며,
2003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2008년에 체코 정부는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2014년에는 최고 권위의 백사자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영국의 쉰들러'인 니콜라스 윈턴은 가족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2015년 7월 1일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체코 프라하 중앙역에 있는 윈턴의 동상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모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온 영웅입니다.
남에게 해준 일보다는 해주지 못한 일을 괴로워하는 성자입니다.
그 아름다운 인생에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삶의 참된 의미는 나무를 심으며 훗날 그 나무 그늘에 앉아 쉴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6.10/8한경.퍼온 글)
(황창연 신부의 행복특강)
41 | 41 | 제41회 죄에 이르는 길 4부 ![]() ![]() | 14-01-08 | 33 | 20998 |
40 | 40 | 제40회 죄에 이르는 길 3부 ![]() ![]() | 13-12-20 | 27 | 15099 |
39 | 39 | 제39회 죄에 이르는 길 2부 ![]() ![]() | 13-12-12 | 24 | 15501 |
38 | 38 | 제38회 죄에 이르는 길 1부 ![]() ![]() | 13-12-05 | 30 | 22065 |
37 | 37 | 제37회 하늘나라 여권 6부 ![]() ![]() | 13-08-02 | 37 | 24096 |
36 | 36 | 제36회 하늘나라 여권 5부 ![]() ![]() | 13-08-02 | 33 | 17230 |
35 | 35 | 제35회 하늘나라 여권 4부 ![]() ![]() | 13-07-26 | 29 | 17847 |
34 | 34 | 제34회 하늘나라 여권 3부 ![]() ![]() | 13-07-26 | 22 | 17132 |
33 | 33 | 제33회 하늘나라 여권 2부 ![]() ![]() | 13-07-19 | 30 | 21380 |
32 | 32 | 제32회 하늘나라 여권 1부 ![]() ![]() | 13-07-17 | 50 | 27422 |
31 | 31 | 제31회 생명을 살리는 말씀 3부 ![]() ![]() | 12-10-22 | 57 | 39208 |
30 | 30 | 제30회 생명을 살리는 말씀 2부 ![]() ![]() | 12-10-15 | 44 | 28981 |
29 | 29 | 제29회 생명을 살리는 말씀 1부 ![]() ![]() | 12-10-09 | 59 | 39386 |
28 | 28 | 제28회 행복한 노년 4부 ![]() ![]() | 12-06-20 | 36 | 34666 |
27 | 27 | 제27회 행복한 노년 3부 ![]() ![]() | 12-06-20 | 33 | 22239 |
26 | 26 | 제26회 행복한 노년 2부 ![]() ![]() | 12-06-20 | 26 | 21877 |
25 | 25 | 제25회 행복한 노년 1부 ![]() ![]() | 12-06-20 | 50 | 41500 |
24 | 24 | 제24회 21세기는 환경의 시대 4부 - 교회와 환경운동 ![]() ![]() | 12-05-14 | 24 | 21804 |
23 | 23 | 제23회 21세기는 환경의 시대 3부 - 환경 호르몬 ![]() ![]() | 12-05-14 | 25 | 17877 |
22 | 22 | 제22회 21세기는 환경의 시대 2부 - 식량 위기 ![]() ![]() | 12-05-14 | 31 | 14642 |
21 | 21 | 제21회 21세기는 환경의 시대 1부 - 에너지 위기 ![]() ![]() | 12-04-26 | 33 | 30743 |
20 | 20 | 제20회 성당에 왜 다니십니까? 4부 ![]() ![]() | 12-04-26 | 25 | 28102 |
19 | 19 | 제19회 성당에 왜 다니십니까? 3부 ![]() ![]() | 12-04-13 | 24 | 28775 |
18 | 18 | 제18회 성당에 왜 다니십니까? 2부 ![]() ![]() | 12-04-02 | 34 | 38190 |
17 | 17 | 제17회 성당에 왜 다니십니까? 1부 ![]() ![]() | 12-04-02 | 60 | 58226 |
16 | 16 | 제16회 21세기는 행복의 시대 ![]() ![]() | 12-03-19 | 89 | 38012 |
15 | 15 | 제15회 21세기는 서비스의 시대 ![]() ![]() | 12-03-19 | 215 | 24453 |
14 | 14 | 제14회 21세기는 노인의 시대 ![]() ![]() | 12-03-13 | 92 | 31102 |
13 | 13 | 제13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 ![]() ![]() | 12-02-28 | 136 | 30441 |
12 | 12 | 제12회 외로우십니까? 3부 ![]() ![]() | 12-02-28 | 108 | 27539 |
11 | 11 | 제11회 외로우십니까? 2부 ![]() ![]() | 12-02-14 | 137 | 29025 |
10 | 10 | 제10회 외로우십니까? 1부 ![]() ![]() | 12-02-06 | 161 | 38776 |
9 | 9 | 제9회 화나십니까? 3부 ![]() ![]() | 12-01-30 | 138 | 32537 |
8 | 8 | 제8회 화나십니까? 2부 ![]() ![]() | 12-01-23 | 169 | 35283 |
7 | 7 | 제7회 화나십니까? 1부 ![]() ![]() | 12-01-16 | 161 | 47645 |
6 | 6 | 제6회 유혹과 행복 6부 ![]() ![]() | 12-01-09 | 224 | 40759 |
5 | 5 | 제5회 유혹과 행복 5부 ![]() ![]() | 12-01-02 | 197 | 39080 |
4 | 4 | 제4회 유혹과 행복 4부 ![]() ![]() | 11-12-26 | 227 | 41639 |
3 | 3 | 제3회 유혹과 행복 3부 ![]() ![]() | 11-12-19 | 367 | 46165 |
2 | 2 | 제2회 유혹과 행복 2부 ![]() ![]() | 11-12-12 | 255 | 53941 |
1 | 1 | 제1회 유혹과 행복 1부 ![]() ![]() | 11-12-05 | 432 | 107843 |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 찰스 '구노'의 아베 마리아
어린 구노는 음악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빠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그 친구 소식도 묻어 왔습니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했습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대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삼종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으레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앙베르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ve Maria는 성모송입니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앙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구노(Charles Francois Gounod) 는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입니다.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치는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한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1841년에는 미사곡을 로마에서 초연하였으며, 레퀴엠 등의 종교곡을 작곡하였고
1851년 "사포"를 작곡,
1859년 "파우스트"로 대성공하고,
1867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등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1855년 성녀 세실리아 장엄미사를 작곡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버리고 종교 음악에 전념하게 됩니다.
빠리외방전교회 성가대장이었을 때,
당시 조선에서 전교하던 빠리외방전교회의 사제였던 친구의 순교 소식에,
영감을 받고 즉흥적으로 성가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이 바로 구노의 아베 마리아인 것입니다
이 성가는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한 성가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입니다.
(퍼온 글)
덧글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그 형벌로, 이 세상에서 병들고 가난하고 저주 받고 고통당하며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여 죽이고 부활시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고 현재의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죽음에서 해방,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누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사시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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